Skip to main content

조세핀 베이커의 삶(Josephine Baker)

The Life of Josephine Baker (1906–1975)

조세핀 베이커의 삶 (1906–1975)

** Josephine Baker는 1920 년대 프랑스에서 큰 인기를 얻은 댄서이자 가수였습니다. 그녀는 또한 그녀의 삶의 많은 부분을 인종 차별과 싸우는 데 바쳤다.

조세핀 베이커 (Josephine Baker)는 춤을 배우고 브로드 웨이에서 성공을 거두기 전까지 빈곤한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8살의 어린 프리다 조세핀 맥도날드(Freda Josephine McDonald)(조세핀 베이커의 출생시 이름)는 부유 한 백인들을위한 하녀로 일하고있었습니다. 13살에 그녀는 집에서 달아나 웨이트리스로 일하면서 클럽과 거리에서 춤을 추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그녀가 윌리 웰스(Willie Wells)와 결혼 한 직후 즈음입니다. 

몇 주 후 그녀는 이혼하였고 코미디 공연을 하며 미국 전역을 여행하기 시작했고 이는 1923 년 뮤지컬 셔플에서 그녀가 역할을 맡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 기간 동안 조세핀은 윌리 베이커(Willie Baker)와 결혼했으며 그녀는 심지어 그와 이혼한 후에도 활동하는 동안 그의 성인 Baker를 사용했다. 조세핀의 경력이 시작되면서 그녀는 뉴욕으로 이사하여 초콜렛 댄디스(Chocolate Dandies)에서 공연했으며 더 플랜테이션 클럽(The Plantation Club)(할렘의 유명한 클럽)의 에델 워터스(Ethel Waters)와 함께 공연했습니다.

1920년대 그녀는 프랑스로 이주하여 곧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고 보수가 많은 퍼포마가되었습니다. 이 당시 프랑스는 미국 재즈와 이국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이 절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깃털로 이루어진 치마만 걸친채 그녀의 댄스 파트너 조 알렉스(Joe Alex)와 함께  한 Danse Sauvage 공연을 통해 프랑스 관객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경력의 전환점은 그 다음 해 Folies Bergère 음악 홀에서 La Folie du Jour라는 공연에서 16개의 바나나로 만든 스커트 이상을 입고 춤 춘 것이었습니다. 파리 시청자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베이커는 곧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고 가장 보수가 많은 퍼포머 중 한 명으로서 파블로 피카소, 어니스트 헤밍웨이, EE 커밍스와 같은 문화적 인물에 존경받으며 '블랙 비너스' 와 "흑진주"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녀는 또한 1,000 개가 넘는 청혼을 받았습니다. 

이 성공 이후 그녀는 노래로 자신의 영역을 넓혔고, 그녀가 충분한 돈을 벌었을 때 큰 저택을 구매하고 가족들을 프랑스로 불러 들였습니다. 2 차 세계 대전 직전에 조세핀은 자신의 모국에서 연기자로 자리 매김하기를 바라면서 미국으로 돌아 왔지만, 아프리카 계 미국인 퍼포머들에 대한 인종 차별과 적대감에 시달렸습니다. 그 후 그녀는 프랑스로 돌아와 프랑스인  사업가 진 라이언(Jean Lion)과 결혼하여 자신의 나라 중 하나가 된 프랑스에 시민권을 취득했습니다.

조세핀이 프랑스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보여주는 일화로, 그녀는 제 2 차 세계 대전 중에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스파이로 일하면서 그녀의 악보와 심지어 속옷에 메시지를 숨겨 전달하고는 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베이커는 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의 최고 무공 훈장을 2개나 수여받았습니다.

1947 년에 그녀는 프랑스 오케스트라 지도자 조 부이론(Jo Bouillon)과 결혼했으며 1950 년부터 전 세계의 아기를 입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총 12 명의 아이들을 입양하여 “무지개 부족” 과 “형제애 실험” 이라고하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종종 사람들을 그녀의 저택으로 초대해 그녀의 아이들을 통해 다른 인종간에도 화목하고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줬습니다.


1950 년대와 60 년대 조세핀은 미국에서 분리주의와 인종 차별에 맞서 싸웠습니다. 1963 년 베이커는 워싱턴에서 열린 행진에 마틴 루터 킹 주니어와 함께 참가했으며 그날의 주목할만한 연사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의 노력을 기리기 위해 NAACP(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전국유색인종인권증진협회)는 5 월 20 일을“Josephine Baker Day”로 명명했습니다.

베이커는 수십 년간 거부 당하고 인종 차별을 다루는 데 평생을 보낸 후 1973 년 뉴욕 ​​카네기 홀에서 공연을했으며 기립 박수를 받았다. 그녀는 관객들에도 불구하고 울음이 터져버릴 정도로 관객들의 태도에 크나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쇼는 독보적이었으며, 이를 통해 큰 성공도 거두게 됨으로써 베이커는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었습니다.

1975 년 4 월, 베이커는 파리 데뷔 50 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파리의 보비노 극장(Bobino Theater)에서 처음으로 시리즈 공연을 했습니다. 이 당시 소피아 로렌 (이탈리아 영화 배우),모나코의 공주 그레이스 (그레이스 켈리)를 포함한 수많은 유명인들이 참석했습니다. 며칠 후인 1975 년 4 월 12 일 베이커는 뇌출혈로 사망했습니다. 그녀의 나이 68살이었습니다.

그녀의 장례식 날은 파리 전역에서 모여든 2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리에 줄을 서서 그녀의 장례 행렬을 목격했으며, 프랑스 정부는 21발의 예포를 준비하였고 그녀는 미국인 여성으로서 역사상 최초로 최고의 군명예로 대우 받으며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 재미있는 사실 : 그녀는 많은 "여성 정부"를 두었다고 합니다
조세핀은 클라라 스미스(Clara Smith), 베시 앨리슨(Bessie Allison), 에이다 "브릭 탑"스미스(Ada "Bricktop" Smith), 컬레트(Colette) 등 많은 여성들과 만났다는 루머가 있습니다. 게다가 심지어 베이커 자신 조차도 프리다 칼로(Frida Kahlo)의 여성 정부였다는 루머가 있습니다.

** 재미있는 사실 : 그녀는 동물을 사랑했습니다
베이커의 애완 동물 치타 치키타 (Chiquita)는 다이아몬드 목줄을 착용한 그녀의 가장 소중한 애완 동물이었습니다. 또한 치키타는 그녀의 공연 중 일부였으며, 때로는 공연이 끝난 후에도 무대에 남아 있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드레싱룸에 염소도 길렀으며, 알버트라는 애완 돼지도 있었는데, 그녀는 종종 애완돼지에게 프랑스 향수를 뿌려줬다고 합니다.

*** 재미있는 사실 : 그녀는 인종차별적인 클럽에서의 공연을 거부했습니다.
베이커는 마이애미의 한 나이트 클럽으로부터 인종차별적인 클럽에서 공연을 하지 않는 그녀의 원칙의 예외로 공연을 해달라고하는 요청과 함께 제안한 10만 달러에 달하는 공연비를 거절한 것으로 유명해 졌는데, 결국 이 클럽은 베이커의 요구에 따라 첫 번째 인종 통합 쇼를 허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조세핀 베이커(Josephine Baker)의 영상들:
(Videos of Josephine)
For ENGLISH please Click the following links to the original articles:

Comments

Popular posts from this blog

프랭키가 남기고 간 유산을 지킵시다/PRESERVING FRANKIE’S LEGACY

프랭키가 남기고 간 유산을 지킵시다 프랭키매닝재단(Frankie Manning Foundation:FMF)은 다음 세대에도 프랭키 매닝의 역사적 발자취들을 보존, 전달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한가지 예로, 프랭키와 관련된 물품이나 그의 영상을 보관하기 위한 기록 보관소를 건설 중에 있다. 그러나 역사를 보존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역시나 프랭키에게서 직접 춤을 배운 댄서들 중 프랭키에게서 받은 영감과 열정이 담긴 그의 춤과 그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댄서들이다. 이하에서, 10대 때부터 프랭키의 친구이자 학생이었던 라모나 스테펠드(Ramona Staffeld)가 그녀와 함께 강습을 했던 피터 스트롬(Peter Strom)과 진행했던 수업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라모나가 직접 린디합러버즈로 보내준 라모나와 프랭키 매닝의 사진 라모나로 부터 작년 텍사스(Texas) 휴스톤(Houston)에서 열린 린디 페스트(Lindy Fest)에서 피터 스트롬과 나는 프랭키 매닝을 기리는 헌정 수업을 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제 모든 수업이 일종의 프랭키 헌정 수업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이번은 정말로 '헌정 수업' 이라는 이름이 붙었죠. 수업 레벨은 중급정도 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 강습은 오늘도 저의 곁에 있어요. 강습때 우리가 다함께 느낀 그 느낌이 아직도 저와 함께 한다는 말이에요. 스윙 아웃을 기본으로, 우리는 스윙이 무엇이고 무엇이 스윙이 아닌지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했어요. 처음에는 시간을 들여서 음악을 들으며 정박자(싱코페이션이 없는 음악)가 무엇인지 구별하는 것을 했어요, 그리고 수업의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이해할때까지 기다린 후에 다음으로 넘어갔어요. 그 다음은, 어떤 동작이 이런 정박자의 스윙이 아닌 음악에 잘 맞을까에 대해서 이야기 했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바운스(펄스-Pulse)와 우리 자세가 조금 더 업라이트(곧은 자세)가 되었어요. 수업의 참여한 사람들은 스윙

‘스윙댄스’가 뭘까요? (What exactly is "Swing"?)

Let's start with the basics... 린디합에 대해서 얘기하기 전에 기본적인 이야기를 먼저 해볼게요 아마 블로그에서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분들은 아주 많이 들어 보셨을 가사입니다 "If don't mean a thing, If it ain't got that swing~" 그런데!!!! 여기서 나오는 Swing 이 뭘까요? 우선, ‘스윙댄스’가 뭘까요? 스윙댄스는 재즈 음악 에 맞춰 춤을 추는 다양한 장르의 춤을 말합니다. 이건 찰스턴, 린디합, 지터벅, 이스트코스트스윙, 웨스트코스트스윙, 발보아, 쉐그(Collegiate shag), 부기우기, 피바디같은 다양한 춤 장르를 포함하는 나무 뿌리 같은 거에요  예를 들자면 라틴댄스 안에는 살사, 차차차, 바차타, 삼바, 메렝게 등이 있는 것처럼 스윙댄스도 다양한 재즈 기반의 댄스를 포함하는 거예요~ 물론 춤 이전에 음악이 있었겠죠? ........음악이 먼저 나왔어요! 우선 재즈음악에도 여러 가지 타입의 재즈음악이 있어요. 스윙 음악은 재즈 음악 중 춤을 위한 재즈 음악입니다. 재즈 음악의 즉흥과 창의성을 기반으로 한 스윙 음악은 1930년대 와 1940년대 미국 전역에서 즐겨 들었어요.( 1930년대 1940년대 빌보드 차트에는 우리가 잘 아는 명곡들이 상당히 있어요) 스윙 음악은 1920년대 아프리카계, 중남미계 미국인들의 커뮤니티인 미국 남부에서 아프리카 음악과 유럽 음악사이에서 퓨전으로 생겨났어요. 음악을 가지고 놀면서 다양한 시도와 실험 속에서 탄생한 셈이죠. 재즈는, 어떻게 보면 음악을 가지고 실험을 한 결과물인 셈이에요. 재즈 음악이 나오기 이전 시절의 음악들은 굉장히 많은 규칙들이 있었기 때문에 딱딱하고 틀에 박힌 음악이었어요. 재즈 음악이 갖고 있는 즉흥성과 창의성을 허용하지 않았었죠. 스윙 음악은 Louis Armstrong, Earl Hines,